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향곡 제9번(베토벤) (문단 편집) == 초연 == [[런던]] 쪽에서 위촉을 받기는 했지만, 첫 공연은 베토벤의 여러 다른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빈에서 행해졌다. 1824년 5월 7일에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음악회에서였는데,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아카데미 공연이기도 했다. 초연을 위해서 베토벤은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편성을 요구했는데, 당시 상설 오케스트라 중에서는 이를 감당할 오케스트라가 전혀 없었다. 예전에는 체계화된 교본이나 교습법이 드물었고 악기 제작 기술이 빈약했기 때문에, 연주자와 합창대에 주력 성악가 넷까지 모으는 건 어려웠다(오죽하면 모차르트도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게 되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 바순을 무려 6대나 사용해서 연주했던 기록이 있다.[* 비싸고 귀한 바순을 소유한 연주자는 드물었다. 심지어 베토벤 교향곡 9번에는 더욱 희귀한 바리에이션인 콘트라바순이 들어간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의 초연을 위해 케른트너토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를 초빙하는 것은 물론, 별도 오디션을 통해 부족한 인원을 더 충원해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야 했다. 심지어, 베토벤이 직접 모든 관악기 파트를 더블링하도록 지시했기에 필요한 연주자의 수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원전연주]]에선 베토벤 교향곡들이 더블링[* 한 파트당 두명이 연주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해 교향곡 9번도 더블링을 금기로 여겼는데[* 이 곡이 각 파트 별로 소리가 전부 따로 구분될 정도로 철저히 신호를 통제하고 있는 곡인 탓에 더블링으로 연주하는게 타당하지 않다고 파악한 건 나름 일리가 있었다.], 교향곡 9번은 예외적으로 베토벤이 직접 더블링을 지시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금기가 깨지게 된다. 이후에는 굳이 더블링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연주하는 일이 드물어졌으며, 교향곡 9번의 경우 관악기를 반드시 더블링 해야 원전연주가 된다.) 하지만 베토벤의 필생의 역작, 곧 마그눔 오푸스인 교향곡 제 9번의 초연은 영 찝찝하게 마무리되었는데,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원리에 대한 이해가 우여곡절 끝에 잘 정립된 요즘에도 어려운 곡을 당대에 손에 꼽을 만한 거대한 규모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 만으로도 현기증이 나는 판에, 곡의 해설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베토벤 본인이 초연 시점에서 청력을 완전 상실하여 지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따라서 명목상으론 지휘대에 베토벤이 앉았지만, 실제 지휘는 그 앞에 선 미하엘 움라우프가 맡아야 했다. 베토벤은 현악 주자들의 활놀림을 살펴 겨우 곡의 진행을 파악해야 했을 정도로 청력이 상실된 상태였기에, 마지막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성악과 관현악의 소리도 듣지 못해 곡이 끝난 것을 파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알토 독창자였던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청중석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고, 박수치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연주가 끝났다고 알았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평생을 바친 역작답게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 공연이었지만 베토벤, 연주자, 관계자들 입장에서 한결같이 찝찝한 공연이었다. 리허설 때 베토벤이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이해 불가능할 정도로 높았던 탓에 자주 심한 말다툼이 있었고, 특히 소프라노 독창자였던 헨리에테 존탁의 경우 '사람 목소리의 파괴자'라고 대놓고 헐뜯는 등 분위기가 아주 흉흉했고, 필생의 역작을 첫 공연한 것 치곤 수입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베토벤에게[* 그리고 아마도 이 영광스러운 연주에 노력을 기울인 모든 이들에게 (...)] 꽤나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420굴덴의 수익을 올렸는데, 이 액수도 당시 화폐 가치로 볼 때 굉장한 거액이기는 했지만 베토벤은 2000굴덴 정도의 수익은 나야 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영 아쉬웠는지, 5월 23일에 황실 무도회장이었던 레두텐잘에서 추가 공연을 열었는데, 당대에 도저히 연주할 수 없던 이 난해한 곡은 2번째 공연에서도 여지 없이 그 극악함을 자랑해서, 초연보다 더한 졸속 공연으로 수익은 커녕 오히려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결국 이 곡이 진짜로 베토벤이 의도한 환희와 영광을 보는 것은 먼 훗날 사람들이 더 음악에 대해 뼈가 굵어진 후에나 가능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